4卷2冊 : 四周雙邊 半郭 17.7 x15.6 cm, 有界, 10行18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2.1 x 21.2 cm.
조선 후기의 학자인 박종량의 유고이다. 박상삼(朴象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박성현(朴成 玹),아버지는 박경원(朴敬源)이고, 어머니는 신진환(申震煥)의 딸인 아주 신씨이고, 부인은 김혁운(金赫運)의딸인 의성 김씨이다. 어렸을 때부터 어른들이 의심스러운 부분의 뜻을 물으 면 반드시 깊이 생각하고 궁구하여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서야 그만두었다 한다. 과거 공 부를 함에 공거문(公車文) 짓기를 일삼았는데 한번이라도 격식에 지나침이 없었다. 그리고 정암(定庵) 김양정(金養楨)의 문하에 들어가 변의(辨疑)하기 어려운 것을 물었다.
1823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였고, 1840년에 어머니의 상을 당함에 삼년동안 내실에도 들지 않고 육즙도 먹지 않았으며, 성묘하는 일이 아니면 여막을 나가지 않는 등 집상(執喪)을 함이 매우 지극하였다. 1846년 봄에 경시(京試)를 볼 때에 어떤 이가 미리 유출된 시제를 보여주며 먼저 시를지어놓을 것을 권하자, 끝내 시제가 걸린 뒤에야 시문을 지었다 한다.경시를 마치 고 집에 돌아오기 전에 우연한 실화로 인해 가산이 전소되었으나 “다행히도 사람이상하지는 않았으니 재물에 어찌 구애받음이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박종익(朴宗益), 박종학(朴宗學) 두 동생들과 함께 의성군 점곡면 단애(丹厓)(동변 2리)에 몇 칸의집을 얽고는 금파정(錦坡亭) 이라고 편액하고, 자질(子姪)들이 학문을연마하는 곳으로 삼았다.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이 정자를지은 뜻은 제군들과 문학을 강론하여 덕있는 인재를 교육해서, 궁(窮)할 때는 효제충 신 지사가 되고 달(達)할 때는 경륜 고명지신(經綸 顧命之臣)을 기르고자 한다.”하며 장학의 충정을 밝혔다. 종족간의 의를 돈독히 하여 종족 중에 혼기를 놓친 사람이 있으면 자신의 재물을 내주어 때를 놓치지 않게 하였으며, 혹은 조금이라도 재주가 있어 더불어 할 만하나 가난하여 배울 수 없는 자에게는 반드시 양식을 보태주어 학문을성취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월촌(의성군 점곡면 동변 3리)의 옛 거주지에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아 문족(門族) 들과 함께 월록서당(月麓書堂)을 짓고, 이 서당에서 문족들의 화수회(花樹會) 등을 개최하고 항상 경계하여 문행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던 중 흥선대원군의 원사 훼철령 으로 철폐되어서 이를 다시 복원하기 위하여 상소를 올렸지만 실패하였다.
이 문집은 1906년 손자인 제승(齊承)이 편집, 간행하였다. 소(疏)의 「의청복서원(擬請復書院)」 에서는 서원의 설립 동기는 강학논현(講學論賢)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치국안민의 양사기관 (養士機關)인 서원의 훼철을 중지할 것을 건의하였다. 「의청척화양이(擬請斥和洋夷)」는서양의 병선(兵船)이 자주 접경함으로써 그들의 사설(邪說)이 국내에 성행하여 민심을 현혹하고 인륜을 파괴하며 기강을 문란하게함이 노불(老佛)의 무리보다 더 심하다고 지적, 급히 군병 을 보내 격퇴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書)의 「상정재류선생(上定齋柳先生)」의 별지 문목 은 이기론(理氣論)에대해 문의한 것이다. 「성리략(性理畧)」은 태극에서 음양, 오행을 거쳐 만물이 생성되는 과정을 설명하고, 인간은 정(靜)의 때에는오성(五性)을 동(動)의 때에는 칠정 (七情)이나타나게 되며, 심(心)은허령․지각․이기를 겸하였고, 성정(性情)을 통하고 중리(衆理) 를 갖추고 만물에 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대학의 8조목과 연관시켜 설명하고, 이것 이야말로 성인의 능사라고 하였다. 「선악설(善惡說)」에서는음과 양, 묘(苗)와초(草)의 관계를 설명하고,이것을 선악의 관계와 연관시켜 설명하였다. 끝 부분에서는 인도(人道)를 다하고 참천지(參天地)하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며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고 말하였다.